요안니스 4세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요안니스 4세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2세의 아들로, 1258년 아버지의 사망으로 8세의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섭정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이 살해된 후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가 권력을 찬탈하여 공동 황제가 되었고,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 요안니스 4세는 실명당하고 유배되었다. 그는 이후 수도사로 생을 마쳤으며, 1290년에는 안드로니코스 2세의 방문을 받았고, 14세기에 성인으로 추앙받았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니케아 황제 -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로,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치스의 아들이자 니케포로스 블렘미데스에게 교육받은 학자 군주였으나, 귀족 억압 정책과 잦은 전쟁으로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사후 라스카리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 니케아 황제 -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귀족 출신으로 니케아에서 비잔티움의 후계 국가를 세우고 황제를 선포했으며, 라틴 제국 등과 관계를 맺고 1221년에 사망했다. - 1305년 사망 - 윌리엄 월리스
윌리엄 월리스는 스코틀랜드 독립전쟁에서 영국 지배에 맞서 싸운 영웅으로, 스털링 다리 전투 승리 후 스코틀랜드 수호관이 되었으나 폴커크 전투에서 패배 후 체포되어 처형되었고, 그의 투쟁은 스코틀랜드 독립의 상징으로 기억된다. - 1305년 사망 - 가메야마 천황
가메야마 천황은 13세기 후반 재위한 일본의 제88대 천황으로, 원나라의 침입에 맞서 국방에 힘쓰고 젠 불교 전파에 기여했으며, 원평제도 개혁을 시도하고 다이카쿠지 황통의 번영을 추구한 인물이다. - 라스카리스 왕조 -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로, 요안니스 3세 두카스 바타치스의 아들이자 니케포로스 블렘미데스에게 교육받은 학자 군주였으나, 귀족 억압 정책과 잦은 전쟁으로 제국을 혼란에 빠뜨렸고, 사후 라스카리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 라스카리스 왕조 -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귀족 출신으로 니케아에서 비잔티움의 후계 국가를 세우고 황제를 선포했으며, 라틴 제국 등과 관계를 맺고 1221년에 사망했다.
요안니스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전체 이름 | 요안니스 두카스 라스카리스 |
로마자 표기 | Iōannēs Doukas Laskarēs |
출생일 | 1250년 12월 25일 |
사망일 | 1305년경 |
종교 | 동방 정교회 |
왕조 | 라스카리스 왕조/바타치스 가문 |
통치 | |
칭호 | 로마인의 황제이자 전제군주 |
니케아 황제 | 니케아 황제 |
비잔티움 황제 | 비잔티움 황제 주장자 |
재위 기간 | 1258년 8월 16일 – 1261년 12월 25일 |
선임자 |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
후임자 |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 |
가계 | |
아버지 |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
어머니 | 엘레나 아세니나 |
2. 생애
요안니스 4세 두카스 라스카리스는 니케아 제국의 황제 테오도로스 2세와 불가리아의 헬레나의 아들로, 1258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7살(또는 8살)[1]의 어린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 부활에 기여한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였다.
어린 황제의 섭정은 처음에는 관료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이었으나, 귀족들에 의해 살해된 후 야심 있는 귀족 지도자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미하일은 1259년 공동 황제로 즉위하며 실권을 장악했고, 1261년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후, 미하일 8세는 자신의 단독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요안니스 4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1261년 12월 25일, 요안니스 4세는 자신의 11번째 생일에 미하일 8세의 명령으로 두 눈을 멀게 되는 형벌을 받고 제위 계승 자격을 박탈당했다.[1] 이후 그는 비티니아의 한 요새(마르마라 해 인근)에 유배되어 남은 생을 다키비자에서 수도사로 보냈다.[2]
1290년에는 미하일 8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가 그를 찾아와 30년 전 아버지의 잔혹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하기도 했다.[4] 요안니스 4세는 1305년경 사망했으며, 사후 성인으로 추대되어 14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기념되기도 했다.
2. 1. 어린 시절과 즉위
요안니스 4세는 니케아 제국의 3대 황제 테오도로스 2세 두카스 라스카리스와 불가리아의 헬레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모는 불가리아의 황제 이반 아센 2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헝가리의 안나 마리아였다. 안나 마리아는 원래 이름이 마리아였으며, 헝가리의 왕 언드라시 2세와 메라니아의 게르트루드의 장녀였다.1258년, 아버지 테오도로스 2세가 사망하자 요안니스 4세는 겨우 7살(또는 8살)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을 재건하는 데 크게 기여한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처음에는 관료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이 섭정을 맡았으나, 귀족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후 귀족들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섭정 자리를 찬탈했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1259년 1월 1일, 스스로 공동 황제 미하일 8세로 즉위했다. 미하일은 요안니스 4세와 육촌 관계였는데, 두 사람 모두 황후 에우프로시네 두카이나 카마테라의 후손이었다.
1261년 7월 25일, 미하일 8세가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고 로마 황제를 선언하자, 요안니스 4세는 니케아에 남겨졌다. 결국 미하일 8세의 명령으로 요안니스 4세는 1261년 12월 25일, 자신의 11번째 생일에 두 눈을 멀게 되는 형벌을 받았다.[1] 이 잔인한 행위로 인해 그는 왕위 계승 자격을 완전히 박탈당하고 비티니아의 한 요새(마르마라 해 인근)에 유배되어 감금되었다. 이 행동은 당시 총대주교였던 아르세니우스 아우토리아누스가 미하일 8세를 파문하는 결과를 낳았으며, 나중에 니케아 근처에서는 요안니스 4세를 사칭한 인물이 일으킨 반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2. 2. 미하일 8세의 섭정과 제위 찬탈
1258년 아버지 테오도로스 2세 라스카리스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요안니스 4세는 겨우 7살(또는 8세)의 어린 나이로 니케아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비잔티움 제국 부활에 큰 공헌을 한 라스카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처음에는 관료 게오르기오스 무잘론이 섭정을 맡았다. 하지만 귀족 세력은 무잘론에게 불만을 품었고, 결국 그를 살해했다.귀족들의 지도자였던 미하일 팔레올로고스가 무잘론의 자리를 차지하며 새로운 섭정이 되었다. 미하일 팔레올로고스는 요안니스 4세와 육촌 관계였으나, 황제 자리에 대한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한 후 1259년 1월 1일, 스스로 공동 황제 미하일 8세를 칭하며 사실상 제위를 찬탈했다.
1261년 7월 25일, 미하일 8세는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 이후, 미하일 8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단독 황제가 되기 위해 어린 요안니스 4세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후 요안니스 4세는 니케아에 남겨졌고, 같은 해 12월 25일, 자신의 11번째 생일에 미하일 8세의 명령으로 두 눈을 뽑히는 잔인한 형벌을 당했다. 신체 훼손은 황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는 비정한 조치였다.[1]
이 사건으로 요안니스 4세는 제위 계승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비티니아의 한 요새에 유배되어 감금되었다. 미하일 8세의 이러한 비인간적인 행위는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였던 아르세니우스 아우토리아누스의 격분을 샀고, 총대주교는 미하일 8세를 파문했다. 또한, 훗날 니케아 근방에서는 스스로 요안니스 4세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나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 3. 실명과 유배 이후
미하일 8세가 1261년 7월 25일 라틴 제국으로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요안니스 4세는 니케아에 남겨졌다. 이후 미하일 8세의 명령으로 1261년 12월 25일, 그의 열한 번째 생일에 두 눈이 멀게 되었다.[1] 이로 인해 그는 왕위 계승 자격을 상실하고 비티니아의 한 요새에 유배되어 투옥되었다. 이러한 행위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아르세니우스 아우토리아누스가 미하일 8세를 파문하는 결과를 낳았고, 나중에는 니케아 근처에서 자신을 요안니스 4세라고 주장하는 인물이 반란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기도 했다.요안니스 4세는 남은 생을 다키비자에서 수도사로 보냈다.[2] 1273년 5월 9일자 앙주의 샤를의 문서에는 요안니스가 감옥에서 탈출하여 샤를의 궁정으로 왔다는 내용과 함께 그에게 연금을 지급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역사가 게오르기오스 파키메레스와 니케포로스 그리고라스가 요안니스가 미하일 8세 사후에도 오랫동안 다키비자에 머물렀다고 기록한 것과 모순된다. 역사가 데노 존 지아나코플로스는 이러한 상반된 증거를 검토한 후, 앙주의 샤를의 문서는 미하일 8세에 반대하는 비잔티움 제국 내 라스카리스 왕조 지지자들과 샤를 자신의 영지 내 그리스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선전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3]
1290년 요안니스는 미하일 8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안드로니코스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의 방문을 받았다. 안드로니코스 2세는 30년 전 자신의 아버지가 요안니스에게 저지른 실명 행위에 대해 용서를 구했다. 역사가 도널드 니콜은 "이 만남은 양측 모두에게, 특히 아버지의 범죄로 인해 제위를 계승한 안드로니코스에게는 더욱 곤혹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4] 폐위된 황제 요안니스 4세는 1305년경 사망했으며, 사후 성인으로 추대되어 14세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그의 축일이 기념되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Sacred Precincts: The Religious Architecture of Non-Muslim Communities Across the Islamic World
https://books.google[...]
Brill
[3]
서적
Emperor Michael Palaeologus and the West
Harvard University Press
[4]
서적
The Last Centuries of Byzantium, 1261–1453
Cambridge University Press
[5]
브리태니커
John IV Lascaris emperor of Nicaea
https://www.britanni[...]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